19세기 말, 기호․호남․영남 세 지역을 기반으로 성리학의 사대 학파(四大學派)가 형성되었다. 호남 지역에서 노사학파(蘆沙學派)에 이어 간재학파(艮齋學派)가 나와 모두 넷이 되었다. 학파의 대표가 활동한 시기로 보면 화서학파(華西學派)가 빠르고 간재학파가 가장 늦다. 학문 계통으로 보면, 화서․노사․간재 세 학파가 율곡학파의 우산 속에 들어가는 한편, 한주학파(寒洲學派)는 퇴계학파의 학맥에 연결된다. 학설상으로는 화서․노사․한주 세 학파가 주리(主理)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를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사상적 근거로 삼은 반면에, 간재학파는 율곡설에 충실하게 성리설을 전개하였으며, 성리설을 척사위정의 근거로 원용(援用)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조선 말기의 사대 학파는 학통과 사설(師說), 지역적 연고를 떠나 성리학사의 마지막 불꽃을 활짝 피웠다. 조선 성리학의 약점으로 지적을 받아왔던 당파성, 분열성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성리학의 본령과 시대정신을 함께 찾으려 하였다. 이 점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