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 측천무후의 일대기! ·전통사서와 역사학자들의 평가에 입각한 공정한 서술 ·독자들 앞에서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알기 쉬운 설명
남존여비의 봉건사회에서 일개 여성이 지존의 자리에 올라 세상 모든 남자들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무측천, 고금을 뒤흔들며 눈부시게 빛나는 이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는 중화제국의 역사에 진정한 기적을 만들었다. 그녀는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전무후무하게도 통치 집단의 최고인 왕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였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장과 학식이 뛰어난 문신들은 그녀의 황관 아래에 머리를 조아렸다. 대당제국은 그녀로 인해 더욱 번성하였고, 대당의 백성들은 그녀로 인해 큰 자부심을 가졌다.
머리말
중화제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
남존여비의 봉건사회에서 일개 여성이 지존의 자리에 올라 세상 모든 남자들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무측천, 고금을 뒤흔들며 눈부시게 빛나는 이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는 중화제국의 역사에 진정한 기적을 만들었다. 그녀는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전무후무하게도 통치 집단의 최고인 왕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였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장과 학식이 뛰어난 문신들은 그녀의 황관 아래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반세기 동안의 정치인생에서 당 태종의 “정관(貞觀: 627~649)의 치(治)”[당나라 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의 치세시기로, 안으로 위징(魏徵)ㆍ방현령(房玄齡) 같은 명신들의 보좌로 태평성세를 구가했고 밖으로 돌궐과 토번 등을 정벌하여 당나라의 기틀을 놓은 시기…옮긴이]를 발전시키고, 당 현종 시기의 “개원성세(開元盛世)”[개원(開元)은 당 현종의 연호…옮긴이]에 기초를 놓았다. 대당제국은 그녀로 인해 더욱 번성하였고, 대당의 백성들은 그녀로 인해 큰 자부심을 가졌다. 정관 11년(637)에 14살이 된 무측천은 당 태종의 부름을 받아 입궁하여 “재인(才人)”에 봉해졌다. 정관 23년(649), 태종이 붕어하자 무측천은 장안의 감업사(感業寺)로 보내져 비구니가 되었다. 당 고종 이치(李治)는 즉위하자 자신과 마음이 통했던 무측천을 다시 입궐시켜 “소의(昭儀)”로 봉하고, 신비(宸妃)라는 칭호를 올렸다. 무측천은 후궁에서 왕(王) 황후ㆍ소숙비(蘇叔妃)와 총애를 다투면서 자신의 친딸까지도 살해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또 조정에서 도당(徒黨)들을 끌어들여 결국 왕 황후와 소숙비를 무너뜨렸다. 영휘 6년(655), 무측천의 황후등극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 규모는 황제의 등극의식을 능가했다. 무측천은 황후의 보좌에 오른 뒤, 황후의 신분과 황제의 총애를 이용해 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각 기관들이 상주한 일들을 황후가 수시로 결정했다.” 황후가 정무를 문제없이 잘 처리했기 때문에 군신들은 경탄해마지 않았다. 고종은 그녀가 국정을 독점하는 것이 싫었지만 산적한 국가대사를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무후는 점차 막후에서 무대로 나와 마침내 고종과 함께 군신들의 알현을 받았다. 상원 원년(674), 고종을 천황으로, 황후를 천후로 불렀다. 사람들은 두 명의 황제라는 의미에서 “이성(二聖)”으로 불렀다. 상원(上元) 원년, 무측천은 “천후”의 자격으로 집정을 시작했다. 천수(天授) 원년(690)에 정식으로 칭제한 후 16년 동안 그녀는 꼭두각시 황제를 폐위시키고 서경업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재상 배염을 제거하였다. 동시에 천하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도성으로 와서 밀고할 것을 장려했으며 혹리를 중용해 이씨 종실을 파멸시키고 그녀를 위해 새로운 왕조를 만들게 하였다. 천수 원년(690), 성지를 내려 즉위한 날로부터 당 황실을 폐하고 국호를 주(周)로 하며 천후라는 칭호를 성신황제로 바꾸었다. 건국의 대업을 마침내 실현했다. 냉철했던 그녀는 혹리들을 기용해 많은 형구와 자백을 유도하는 수단을 만들어 공신들을 비롯한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무주(武周) 정권이 수립된 후 권력투쟁이 완화되면서 이런 모습은 사라졌다. 그녀는 대사를 치를 때 서두르지 않고 면밀하게 따져보고 추진하였다. 그녀의 언행을 살펴보면 잔인ㆍ총명ㆍ광분ㆍ냉정 등의 특징이 놀라울 정도로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용병술에 정통하였다. 칭제한 후 인재의 선발과 기용을 중시했다. 그녀는 수나라 이래의 과거제도를 개선하여 널리 인재를 뽑고 자천이나 시관(試官)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밖에 그녀는 전시(殿試: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시험…옮긴이)와 무거제도(武擧制度: 무예와 병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는 시험…옮긴이)를 만들어 인재를 발굴했다. 무측천은 만년에 제국의 후계자 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최종적으로 그녀는 이씨 당나라로의 회귀정책을 취해 이현(李顯)에게 태자의 자리를 주었다. 신룡(神龍) 원년(705) 정월, 장간지(張柬之) 등은 쿠데타를 일으켜 무측천의 퇴위를 강요하여 중종을 복위시켰다. 중종 신룡 원년(705) 11월, 무측천은 향년 82세로 호화로운 궁궐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측천은 죽기 전에 능 앞에 글자를 넣지 않은 비석을 하나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50년 동안 천하를 호령했던 여황제였지만 죽어서는 글자 하나 새기지 않은 비석을 남겼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공덕이 무량하여 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공과(功過)와 시비는 자신이 떠벌리기 보다는 후인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점을 무측천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지앙(吳江) 2006년 8월 8일 | |